Groovers' Pick Vol. 26

그루버스는 주기적으로 타이틀들을 엄선해서 당 기간의 주목할 만한 추천앨범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로 최근에 발매된 신보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좋은 앨범들과 개별 곡들이 있다면 발매시점과 무관하게 적극 추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일한 타이틀의 경우도 녹음과 패키지의 구성에 따라 다양한 버전들이 있는 최근의 음원시장 추세에 따라 같은 제목의 앨범이라도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인지, 추천의 의미가 있는 지 등을 세세히 구분해서 다양한 음악애호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드뷔시 : 피아노 곡집

메나헴 프레슬러/피아노

DG

2017.4.4~7, 파리

 

 

 

 

메나헴 프레슬러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보자르 트리오를 이끈 현역 최고령 피아니스트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앙상블리스트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다른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화를 이끌어내는데 음악 인생을 바쳤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독주자로서 청중 앞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나이 80이 넘어서의 일이었다. 85세의 독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프레슬러는 2014년 베를린 필과 협연하며 독주자로서 베를린 무대에 데뷔했는데, 이 공연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포레와 라벨의 곡이 각각 한 곡씩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프레슬러의 역시 독주자로서의 DG 데뷔앨범인 이 녹음은 타이틀을 [clair de lune]로 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드뷔시 독주곡집이라고 할 수 있다. 드뷔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오는 일련의 앨범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화제작. 드뷔시와 프레슬러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 되었다. 1946년에 개최된 드뷔시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을 수상한 프레슬러의 경력은 보자르 트리오의 리더로서 지낸 반세기의 시간과 6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디스코 그래피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3번째 트랙인 <월광>은 여러모로 이 음반의 성격과 완성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그야말로 타이틀 곡에 걸맞는 역할과 위상을 갖고 있다. 상당히 느린 템포로 담담히 노래하는 프레슬러의 손가락은 원숙한 대가란 이런 것이다를 음악으로 가르쳐 준다. 원로, 경륜이라고 할만한 걸 갖춘 어른의 이야기. 그것이 프레슬러의 드뷔시다. 마치 스타카토처럼 서두를 처리하는 드뷔시의 전주곡집 1집의 1곡 <델피의 무녀>는 올해 94세의 이 노대가가 템포란 빠르기가 아닌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교재가 아닐까. 터치 하나하나가 깊은 맛이 있고 템포는 느긋하며, 자칫 순간순간의 음향의 유희처럼 들리기 쉬운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을 꿰뚫는 거시적인 안목이 느껴진다. 이 음원만큼 재생기기의 성능을 요구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최신보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프레슬러의 드뷔시 피아노 곡집은 그 비경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스트리밍에서 끌어다 와서 통상의 PC 스피커로 듣는 프레슬러의 <월광>은 손가락이 잘 돌아가지 않아 관록으로 어렵사리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다분하다. 프레슬러의 은근한 터치와 유유자적한 템포가 주는 여유와 깊이는 잘 세팅된 하이파이 이상의 오디오가 아니라면 재생불가.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주변에서 부유하는 듯 하면서도 또렷한 사운드가 제대로 재생될 때 청자가 받는 느낌은 단순한 쾌감을 넘어선 감동이다. 프레슬러의 이 녹음을 제외한 드뷔시 피아노 곡집 콜렉션은 상상하기 어렵다. 강력히 추천한다.

 

 

 

드뷔시 : 전주곡집 1, 2권, 연습곡

모니끄 하스/피아노

DG

1949.6.3, 함부르크

 

 

 

 

드뷔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일련의 앨범들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음원. 190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모니크 아스는 그녀가 태어난 시대의 자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숨쉬던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공기가 그녀를 옭아매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많은 피아니스트들처럼 아스 역시 독일계가 득세하고 있는 낭만파 사조 대신 근현대 프랑스 음악에 경도되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아스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명성을 획득하게 된다. 뿔랑은 그녀를 ‘기가막히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랑스런 아스’라고 했고, 앙리 뒤트외는 라벨의 음악을 가장 훌륭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그녀를 꼽았다. 못지 않게 주목받았던, 디스크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그녀의 드뷔시 피아노 곡집은 2006년 발매된 8장짜리 DG 전집으로만 구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고해상도 음원으로 출시된 것이다. 아날로그 음원의 고해상도 음원으로의 복각에 관한한 최근에 거의 백퍼센트의 적중도를 보이고 있는 DG이니만큼 드뷔시 피아노 음악의 콜렉터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고해상도 음원으로의 이행은 아스의 양손이 또렷한 존재감을 뽐내며 건반 위를 뛰노는 광경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좋게 말해 일체감이 들었던 CD의 사운드가 얼마나 뒤엉킨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차라리 지저귀는 듯한 오른손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껴지는 것을 듣는 이 피아니스트의 오랜 팬은 지난 세월이 야속할 것이다. 물론 그 오랜 기다림은 확실한 보상을 받은 셈이지만.

 

 

 

 

드뷔시 : 가곡집

제라르 수제/달톤 볼드윈

DG

1961.5, 베를린

 

 

 

 

독일에 피셔-디스카우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제라르 수제가 있다, 는 식의 설명은 폭력적이리만치 도식적인 설명이지만 수제가 프랑스 예술 가곡에서 가지는 위상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는 최소한의 장점이 있다. 물론 이 탁월한 프랑스 바리톤이 독일 예술가곡의 세계에서 이뤄낸 성취를 무시하면서라는 또 다른 치명적 단점이 존재하는 설명이지만. 수제는 특히 가곡 장르에 천착했던 포레에 정통해서 포레 가곡의 1인자로 군림했던 팡젤라의 재래라는 격찬을 받았다. 엘리 아멜링과 함께 EMI에서 완성한 포레의 가곡 전집은 아직까지 레퍼런스로서의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명반. 일생의 파트너였던 달톤 볼드윈과 녹음한 이 드뷔시 가곡집은 오래 전부터 곡의 구성과 연주의 완성도에서 비단 드뷔시의 가곡 세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가곡으로의 입문용으로 사랑받았던 녹음이다. 대학에서 음악이 아닌 철학을 전공했던 이 지적인 바리톤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애독가로도 유명했고, 프랑스어가 지닌 에스프리를 살려내는 섬세하고 명확한 발음은 지금까지 프랑스 가곡을 부르려는 후배 가수들의 전범이 되고 있다. 이 장르의 애호가들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는 명반이지만 복각의 완성도에서만큼은 듣는 이 모두가 할 말이 많을 듯 싶다. 거의 오디오 파일급으로 가운데에 튼실하게 자리잡은 음상은 시대의 한계를 드러내는 협소함 대신 짙은 밀도감으로 다가온다. 수제의 혀가 프랑스어의 에스프리를 남김없이 표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정경이 생동감있게 재현된다. 이런 옛날 녹음에서 최신 녹음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극사실주의가 실현되는 데에 어이가 없을 정도. 드뷔시의 가곡이니만큼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피아노의 울림도 적확하게 포착되어 있다. 제대로만 재생하면 타건의 울림이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순간순간을 짜릿하게 즐길 수 있다. 이른바 오디오 파일을 위한 보컬음반으로도 소개할 수 있는 음원으로 이 오래된 녹음이 재탄생했다.

 

 

 

베토벤 : 교향곡 5, 7번

야프 반 즈베덴/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DG

2015.10.29~31, 데이비드 게펜 홀, 링컨센터, 뉴욕

 

 

 

 

뉴욕필의 새로운 수장이 된 즈베덴은 역대 최연소인 19살의 나이로 로열 콘체르토헤보우의 바이올린 파트 악장을 역임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이곳에서 그는 숱한 거장들의 지휘를 경험했다. 즈베덴의 지휘자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레너드 번스타인은 베를린에서 그에게 리허설 지휘를 맡겼고, 즈베덴은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댈러스 심포니와 홍콩필이라는, 서양 고전음악의 영역에서는 핵심 요지가 아닌 곳에서 메이저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역임했을 뿐인 즈베덴이 비록 독이 든 성배로 취급받지만 뉴욕필의 상임으로 취임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 자연스런 반응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녹음을 통해서 접한 즈베덴의 지휘는 뉴욕필 상임지휘자로의 취임이 영전이 아니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외려 시카고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리카르도 무티와 ‘작곡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는, 다분히 모욕적인 이유로 거절당한 살로넨 이후 이렇다할 대안이 없던 뉴욕필에게는 이 정도의 실력자라면 구세주나 다를 바 없다고 해야 옳다. 5번 교향곡에서조차 표제에 짓눌리지 않은 활기 찬 연주를 뉴욕필에 요구하는 즈베덴은 오케스트라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데, 통상적인 것에 비해 살짝 빠른 템포에도 살짝 어두운 톤 컬러와 듬직한 무게감이 그 증거. 데카의 녹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악평이 들려오지만, 고해상도 음원으로 들어보면 활기가 흘러 넘치는 이 연주의 성가를 귀가 아닌 상상력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만 하는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이 고해상도 음원에서는 교향곡 5번 2악장의 유려한 흐름과 목관의 음미하는 듯한 여운이 귀를 즐겁게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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