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overs' Pick Vol. 23

그루버스는 주기적으로 타이틀들을 엄선해서 당 기간의 주목할 만한 추천앨범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로 최근에 발매된 신보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좋은 앨범들과 개별 곡들이 있다면 발매시점과 무관하게 적극 추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일한 타이틀의 경우도 녹음과 패키지의 구성에 따라 다양한 버전들이 있는 최근의 음원시장 추세에 따라 같은 제목의 앨범이라도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인지, 추천의 의미가 있는 지 등을 세세히 구분해서 다양한 음악애호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스트라빈스키 : 장송적 노래, 불꽃놀이, 환성적인 스케르초, 봄의 제전

리카르도 샤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DECCA

녹음 : 2017.8, KKL, 루체른, 스위스

 

 

 

최근 클래식 음반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곡이라면 단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다. 로열 콘체르토 헤보우의 상임으로 부임한 다니엘 가티가 녹음한 오케스트라 버전 뿐만 아니라 아믈랭과 안스네스가 피아노 이중주로 연주한 버전까지 초연에서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 냈던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은 난데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로열 콘체르토헤보우의 전임 상임 지휘자이자 아바도의 뒤를 이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상임이 된 샤이의 신보에서 화제의 핵심은 세계 최초 녹음인 ‘장송적 노래’다. 스트라빈스키의 스승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908년 사망하자(이들은 학교 같은 제도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곡 레슨의 형태로 사제관계를 맺었다) 추모를 위해 같은 해 작곡한 곡이다. 초연은 다음 해인 1909년 1월 17일에 이루어졌으며, 2015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의 림스키 음악원에서 러시아 혁명의 난리통에 분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악보가 발견되어 이듬 해 12월에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에 의해 감격적인 재연이 이루어졌다(아시아 초연은 치열한 경쟁 끝에 서울 시향이 선정되어 올해 1월에 정기연주회를 통해 국내 초연이자 아시아 초연이 성사되었다.

정명훈 부임 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서울 시향의 위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 음반의 프로그램은 사실상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세계 최초 녹음인 장송적 노래와 다른 두 작품을 포함한 초기 작품 콜렉션과 봄의 제전. 불꽃놀이와 환성적인 스케르초는 대부분의 감상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곡일 ‘장송적 노래’를 위한 좋은 가이드가 되어준다. 누구라도 이 곡들이 같은 사람에 의해 작곡된 곡인지를 알 수 있는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는데, 스승의 추모를 위한 곡인 만큼 ‘장송적 노래’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 어법이 짙게 배어난다는 점 정도를 일러둘 필요는 있을 듯 하다. 이 초기 곡들은 장차 20세기 음악계의 거물이 될 젊은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곡들이지만 누구나가 다음 레퍼토리, ‘봄의 제전’을 기다리는 될 것이다. 이미 두 번의 녹음(첫 녹음은 클리블랜드와 두 번째 녹음은 콘체르토헤보우와)을 통해 이 레퍼토리의 녹음 목록에서 지워지지 않을 자취를 남긴 리카르도 샤이의 해석은 대체로 이전과 동일한 궤적을 따른다. 거칠게 요약하자면(하지만 이 특성들이 너무나도 강한 방향성과 특징을 띠고 있기에 불가피한 요약이기도 하다) 투명하고 느리다(!). 모든 텍스춰가 훤히 비치는 악구처리는 아무 악단이나 해낼 수 없는,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의 수석들과 명성 높은 솔리스트들로 이루어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명인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재현이지만 지휘자의 확고부동한 비전에 따른 ‘해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발레 음악 연주의 성과를 얼마나 무용수들에게 친절한가에 두는 이들에게 이 연주는 몇 가지 의문점을 던져줄 것이다.

앞서 이 연주의 가장 큰 특징으로 느린 템포를 들었는데 이 발레음악의 대부분이 폭력적이고 발작적인 움직임들을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투명한 대신에 육중한 무게감이 실린 풀 오케스트라의 울림을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다이내믹의 부재와 함께 높은 평점을 주기에는 아쉼움이 남는다. 하지만 데카의 녹음팀은 연주상의 아쉬움들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성과를 보여주는데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텍스춰는 샤이-루체른 못지 않게 샤이와 작업한 이래 좀처럼 약점을 드러내 본 적이 없는 데카 녹음팀의 공이기도 하다. 실내악을 방불케 하는 치밀하고 투명한 음향은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다름 아닌 ‘봄의 제전’을 산뜻하고 투명하게 울린 샤이의 신보는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환영받기 힘들겠지만, 오디오 애호가들에게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음향’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런 점에서 오디오 파일들에게는 추천할만한 음원. 메인 레퍼토리인 ‘봄의 제전’이 아쉽지만, 또 다른 메인인 ‘장송적 노래’는 당분간 이 레코딩이 아니라면 들어볼 기회가 없으므로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권할 수 있겠다.

 

 

 

브람스 : 교향곡 전집

리카르도 샤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DECCA

녹음 : 2012.5~2013.5,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샤이가 2002년 16년 동안 재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로열 콘체르토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상임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의 다음 행보에 세계 음악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는 200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에 취임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유서 깊은 앙상블의 포디엄에 서게 된 샤이는 카라얀의 주선으로 오래 전 슈만의 교향곡 4번과 R.슈트라우스의 <돈 후안>을 연주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이미 그때부터 샤이는 게반트하우스의 ‘풍성한 배음과 전체 음향에 은은하게 살짝 입혀진 어두운 터치, 오케스트라의 전반적인 색채와 특징을 실제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현악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이 앙상블이 빚어내는 음악적인 질서와 규칙, 그리고 투명한 음향’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중부 유럽과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악단의 하나로서 오랜 전통에 기반한 독자적인 사운드 - 윗 단락에서 샤이가 애정어린 어조로 묘사한 바로 그 사운드-에 샤이는 탄력적인 리듬과 생기,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감을 더했다.

그라모폰 상을 받으며 음반계에 화려하게 선보인 이들 콤비는 곧이어 독일 레퍼토리의 핵심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브람스의 관현악곡들 녹음에 착수했는데 평단과 애호가들의 공통된 격찬을 이끌어낸 넬슨 프레이레와의 피아노 협주곡 레코딩에 이어 녹음한 것이 본작이다. 해석의 기조는 샤이가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면서 설계한 해석의 방향과 거의 같다. 텍스춰는 투명하고 템포는 빠르며, 다이내믹은 부족함이 없지만 그 울림이 울림 이상의 힘을 과시하면서 앙상블을 흐트려 놓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 결과 기능적인 우수성이 두드러지는 연주가 종종 빠지기 쉬운 함정, 기계적인 단조로움과는 인연이 먼 살아 숨쉬는 약동감이 흘러 넘치면서도 역설적으로 단정한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특징을 눈여겨 봐주길 당부하고 싶다. 음반 발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샤이가 이제껏 단련해 온 그 어떤 오케스트라에 못지 않는 게반트하우스의 기능성에 찬사를 보내왔지만, 레퍼토리가 다름 아닌 브람스인 만큼 ‘고전적 아취’야말로 연주의 성패에 결정적인 요소로 꼽아야 할 것이다. 샤이는 빠른 템포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단정함을 통해 낭만시대의 끝자락에서 고전주의의 향기에 취해 있던 브람스의 음악 어법을 설득력 있게 들려줄 수 있었다. 템포나 텍스춰에 비해 음색은 좋게 말해 게반트하우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베를린 필을 지휘해 같은 노선에 의한 전집을 녹음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레코딩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극명해진다. 빈필에 비해 좀 더 단단하지만 모노 톤으로 평가받는 베를린 필에 비해서도 게반트하우스의 음의 팔레트는 제한되어 있다. 음의 밀도가 높기에 결코 삭막하게 들리진 않지만 게반트하우스의 현은 브람스 교향곡 하면 익히 떠올리기 마련인 진득한 음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3번 교향곡의 우수 어린 선율이 훨씬 더 날카롭게 쌉싸름한 맛을 낸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어쨌든 1번과 4번 교향곡의 4악장에서 샤이-게반트하우스가 구축하는 클라이맥스를 이전 세대의 명연들을 즐겨 듣는 이들이라면 틀림 없이 낯설게 여길 것이다. 물론 그들조차도 1번 교향곡 4악장에서 알펜 호른의 선율을 부각시키면서 빈 구석 하나 없이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장대한 클라이맥스에 압도되겠지만. 개인적으로 아끼는 4번 교향곡의 4악장을 바로크 음악이 지닌 형식미를 현대적 으로 재현하는데 초점을 두지 않고 게반트하우스의 수준 높은 기능성을 남김없이 동원해 지극히 교향악적으로 들려주는 해석이 이 세트가 지향하는 바를 웅변한다고 하겠다.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대학축적 서곡 등 작곡자의 주요 관현악곡들과 1981년 발견된 1번 교향곡 2악장의 1875년 초연 버전, 4번 1악장 도입부의 수정 버전, 피아노를 위한 <인터메초> 중 Op.116-4번과 Op-117-1번의 파울 클렝겔 관현악 편곡 버전 등 수록곡도 여타의 다른 전집들에 비해 풍성하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에서 그 위용을 과시했던 필립 샤이니는 여기서도 자신이 현역 최고 중에 하나임을 증명한다. 무게감에 중점을 두지 않은 해석에도 불구하고 음의 확산감이 인상적인 데에는 녹음의 힘이 크다. 무엇보다 투박함과 유려함 어딘가에 위치한, 중부 유럽 최고의 명문 악단 게반트하우스의 현을 지닌 매력을 이렇게까지 잘 포착해낸 녹음은 찾기 힘들다. 강력히 추천한다.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피아노 소나타 32번

리카르도 샤이, 넬슨 프레이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DECCA

녹음 : 2014.3.5~8,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넬슨 프레이레의 근래 보여주는 활동은 노익장의 화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한때 아르헤르치와 긴밀한 호흡을 유지하는 원숙한 피아노 듀오 파트너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던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화려하고 웅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수수하고 사색적인 프레이레의 피아니즘이 뒤늦게나마 빛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에게 뒤늦은 명성을 가져다 주었던 샤이와의 파트너 쉽이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쉽기 그지 없다. 샤이-게반트하우스와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집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회고할 나이에 이르른 노 피아니스트에게 첫 번째 전성기를 선사했고, 이들이 두 번째로 녹음한 것이 바로 본작이다. 샤이로서는 다름 아닌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1930년대의 유럽 음악계를 탐구한다는 학구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긴 했지만 하지만 ‘재즈’ 피아니스트 볼라니와 거쉰을 녹음한 프로젝트는 신선함을 넘어선 파격이었다. 게반트하우스 재임 시절 이 악단의 오랜 전통에 걸맞는 ‘고전’ 파트를 담당하는 피아니스트로 프레이레가 낙점된 셈인데, 프레이레는 이 레코딩에서 그 역할을 200% 달성해내고 있다. 연주의 수준과 방향성은 그라모폰 상을 수상한 이들의 전작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집과 동일하며, 낙낙하고 투명한 피아노의 울림이 듣는 이를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2악장이 해석의 성격과 방향을 잘 나타낸다. 사실 눈 밝은 이라면 베토벤의 ‘마지막 협주곡’과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커플링한 프로그램 구성에서 이미 피아니스트의 의도를 읽었을 것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투명하고 낙낙한 울림을 오케스트라의 웅혼한 투티로 감싼 녹음의 완성도는 솜씨라는 공예적 만듦새와 더 어울리는 표현만으로는 그 가치를 온당하게 매길 수 없다. 그만큼 이 녹음의 품위는 연주에 그것에 비길만치 높다. 듣다 보면 향기가 날 것만 같은, 근래 보기 드문 품격 있는 녹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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