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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이탈리아인 – 레스피기, 보케리니, 알비노니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나 그곳의 음악학교를 졸업한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불현듯 향한 곳은 러시아였다. 레스피기가 바이올린 주자 일자리를 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음악가 안톤 루빈스타인 도시였고 레스피기가 도착했을 때에는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곳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젊은 레스피기는 이곳의 분위기, 그리고 이곳의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이 그랬는데 이토록 화려한 관현악 작품을 레스피기는 이전까지 들어본 바가 없었다. 레스피기는 문득 자신의 태생과 선배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나고 오페라가 쉴 새 없이 울리는 곳에서 살았다. 대본, 성악가, 아리아. 고국의 음악에는 오케스트라보다 중요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연주하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은 오케스트라만이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운명은 정해졌다. 그는 관현악 작곡가로 온전히 살기로 마음 먹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레스피기는 1913년에 로마 체칠리아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레스피기는 다시 돌아온 이탈리아, 그리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게 된 로마 또한 그의 마음에 드는 도시였다. 레스피기가 작곡한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라는 이름의 로마 3부작은 레스피기가 음악으로 바라본 로마의 모습이며 그 중에서 1916년에 작곡된 <로마의 분수>와 1924년에 작곡된 <로마의 소나무>는 레스피기 관현악의 결정판으로 인정 받는 작품. 이와는 대비되는 분위기의 <고풍적 아리아와 무곡 모음곡 3번>은 오래된 이탈리아의 류트 음악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 발전시킨 작품이다.

20세기 초반에 레스피기가 로마의 이곳 저곳을 거닐고 있을 때, 1780년의 루이지 보케리니는 여느 때처럼 마드리드의 밤길을 걷고 있었다.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 이곳에 정착한지 어느새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인생의 반을 이곳 마드리드에서 보낸데다가 이곳 사람과 결혼까지 했으니 이제 반쯤은 스페인 사람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비록 타국에서의 생활이었지만 보케리니의 눈에는 이탈리아인과 스페인인은 닮은 점이 많아 보였다. 그들은 축제를 사랑하고, 순간을 즐길 줄 알았다. 특히 그들의 밤이 그랬다. 마드리드 사람들은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즐겁게 밤을 태워버렸다. ‘마드리드 거리의 밤의 음악’이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한 <5중주>에서 보케리니는 자유로운 그들의 밤을 묘사한다. 보케리니의 작품 안에서 마드리드 사람들은 바이올린과 첼로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이지 보케리니의 일흔 해 선배인 토마소 알비노니의 음악, <아다지오>가 있다. 이 바로크 시대 거장의 음악은 무척 내성적이지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이 음악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아다지오로 만들었다. 자신의 손끝으로 지휘되는 작품은 유명하고, 연주효과가 확실해야 한다는 카라얀의 철학에 이 <아다지오>는 확실하게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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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4개의 교향곡

음악계에 전해져 오는 격언 비슷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연주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르치면 된다’ 연주에 대한 재능이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이 문장을 살짝 비틀어볼 수도 있다. 작곡가를 위한 새로운 문장은 다음과 같다.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는 사람은 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장르로 가면 된다’

교향곡, 음악사의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교향곡이라는 장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느 순간부터 이 장르는 음악계의 정점에 있는 것처럼 대접받고 추앙 받았고 너나 할 것 없이 이 장르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요제프 하이든을 시작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리고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차례로 등장했고 특히 베토벤이 이곳에서 일구어낸 업적은 대단했다.

베토벤과 비교했을 때 당연히 이 장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아예 이 장르에서 멀어지기로 했다. 최고가 되려면 길을 새로 내고 혼자 달리면 된다는 말처럼 바그너는 자신만의 세계를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또 저기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민에 휩싸였다. 프란츠 슈베르트, 그리고 로베르트 슈만이 그랬다. 그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멜로디가 흘러야만 하는 가곡의 달인들이었지만 교향곡까지 그런 식으로 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교향곡이라는 길을 겨우 걸어내었다. 그리고 여기 그들로부터 다소간 떨어져있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서있다. 그는 자신 앞에 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수십 년 동안 서성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베토벤이 내 뒤에 서있다.”

브람스는 실제로 이렇게 느꼈고, 느낀바 그대로를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 꽤 오랜 시간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이 교향곡을 위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저울질하면서 지냈고 첫 교향곡인 <교향곡 1번 다단조, Op. 68>이 세상에 나온 것은 작품에 착수한 지 20년이 지나서인 1876년이었다. 첫 작품을 쓰고 난 뒤 베토벤의 망령은 조금 희미해졌던 것일까? 그의 작곡 속도는 탄력이 붙어 이후 1년뒤인 1877년에는 <교향곡 2번 라장조, Op. 73>가 나왔다. <교향곡 3번 바장조, Op. 90>는 그로부터 6년뒤인 1883년, 그리고 마지막 교향곡일 될 <교향곡 4번 마단조, Op. 98>는 1885년의 작품이었다. 모두 브람스 작품 중에서도, 그리고 교향곡의 역사상 흠잡을 데 없는 위대한 걸작이었다. 브람스는 기우 속에 20년을 보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오랜 고민이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내기 위한 자양분 되었던 것일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브람스는 베토벤의 뒤를 이었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이 게르만 거장의 작품을 위풍당당하게 전시한다. 그는 지휘자로서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를 언제나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가장 강력한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 언제나 성공을 거머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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