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QS가이드 멤버쉽 구매 그루버스 플레이어 다운로드

프롤로그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 즉 해방 직후부터 시작해 미군정 통치가 종료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3년까지의 기간을 소위 ‘해방공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해방공간이라는 시기는 남과 북, 일제 강점기와 현대가 모두 교차하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음악계의 양상 역시 매우 흥미롭다. 수많은 음악가와 음악단체들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적인 음악을 수립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내세우며 활동을 이어간 것이다. 이러한 의욕적인 활동은 적지 않은 성과를 낳았다. 하지만 좌우 이념대립이 격화되던 당시의 상황은 결국 음악인들마저 분열하게 만들었고, 결국 남과 북으로 갈라져버린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개할 해방 이후 최초의 오케스트라 “고려교향악단”을 포함해 총 세 번에 걸쳐 해방공간 당시의 주목할만한 음악가와 연주단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얼핏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의 삶과는 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음악가와 연주단체들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오늘날 한국 음악계의 정체성과 뿌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의외로 친숙하고 밀접하게 느껴질 것이다.  

 

 

고려교향악단의 탄생과 활동

 

해방 후 한 달이 지난 1945년 9월 15일, 우리에게 <희망의 나라로> 등의 노래로 잘 알려진 작곡가 현제명(玄濟明, 1902∼1960)의 주도로 “고려교향악협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 고려교향악협회는 ‘서양 고전음악 연주’와 ‘서양 고전음악을 장려하고 음악발전을 통해 문화부흥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클래식음악 위주의 활동을 하고자 했던 단체였던 셈이다.  

 

이렇게 탄생한 고려교향악협회는 수많은 음악가들을 모아 고려교향악단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현재 을지로 부근에 위치한 수도극장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등을 연주하는 창단공연을 가지며 화려한 출발을 하게 된다. 해방 이후 우리 음악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최초의 오케스트라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이후 고려교향악단은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며 당시의 연주문화를 주도하는 단체로 급성장했다. 1946년 2월에 열린 제1회 정기연주회를 시작으로 총 26회의 정기연주회를 개최했고 정기연주회 외에도 어린이날 기념 공연이나 광복 기념 공연, UN사절단 환영행사, 미소공동위원회 기념 공연 등 공적인 성격의 공연에도 자주 나섰다. 또한 부산과 대구에서 공연을 갖는 등 지방 순회연주까지도 소화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 고려교향악단이 연주했던 주요 레퍼토리는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 등 전형적인 서양 클래식음악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에 서양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은 시대지만 의외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던 모양이다. 고려교향악단 연주회가 열리는 극장은 항상 관객들로 가득 들어찼으며 기부금을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미군정의 재정 지원까지 받으며 여타 음악단체들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당시 미군정에서 음악정책을 담당했던 미군 중위 모리스 폴크너(Maurice Faulkner)의 증언을 보면 고려교향악단이 당시 얼마나 ‘잘나가는’ 오케스트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기악계에 있어서 한 가지 긍정적인 요소는 3천만 민중들의 나라인 한국의 범국가적 단체가 된 50인조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고려교향악단)의 존재다. 학무국은 이 오케스트라 조직을 지원하였고 서울에서 진행되는 스쿨 콘서트 시리즈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폴크너의 회고, Music Education in the Orient(1947) 中에서-

 

임원식의 등장, 비상하는 고려교향악단

 

1946년 9월 29일, 고려교향악단은 임원식(林元植, 1919~2002)의 지휘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피아노 : 윤기선)과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이라는 묵직한 레퍼토리를 연주했다. 이날 고려교향악단의 지휘봉을 처음 잡은 임원식은 일본과 만주에서 음악학교를 다녔고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 받던 하얼빈 교향악단을 지휘할 정도로 촉망 받는 지휘자였으며 일본 지휘계의 1세대 원로로 평가 받는 거장 지휘자 아사히나 다카시(朝比奈隆,)의 몇 안 되는 제자이기도 했다.

 

그런 임원식이 만주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것은 고려교향악단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지휘를 공부한 임원식은 고려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며 오케스트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이든이나 베토벤 같은 고전시대 관현악곡은 물론 차이콥스키, 브람스, 바그너, 림스키-코르사코프, 슈만 등 19세기 작곡가들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도 레퍼토리로 삼으며 당시 다른 음악가들이 보여줄 수 없었던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임원식의 활약에 힘입어 고려교향악단은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연주회를 개최하며 꾸준한 관객몰이에 나섰다. 지금도 몇몇 시립교향악단 등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매달 꾸준히 공연을 가지는 오케스트라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고려교향악단에 독보적인 활동에 대해 작곡가 이건우(李健雨, 1919~1998)는 당시 신문에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악단시평을 쓰라는 부탁이므로 쓰기는 하나 실은 썩 마음에 내키는 주문은 아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많으면야 대서특필하여 뽐내어도 보겠는데 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때문이다. (...중략...) 매월 1회씩 공연을 가지는 고려교향악단 외에는 간혹 성글기 짝이 없는 전람회식 음악회가 보여질 뿐이다.

 

-1947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고려교향악단의 몰락

 

하지만 1948년 5월, 임원식은 고려교향악단 미국인 후원자들을 위한 기념공연 지휘를 마지막으로 고려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자리를 내려놓는다. 줄리어드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미군정 음악고문관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헤이모비츠(Ely Haimowitz)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다. 임원식 개인에게는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유학길이었지만 확실한 흥행카드를  떠나 보내야 하는 고려교향악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는 현실이 되어 임원식의 유학을 기점으로 고려교향악단은 서서히 정점에서 내려오게 된다. 특히 미군정이 공연 티켓 가격에 부과되는 세금을 무려 100%나 인상한 이른바 ‘십할입장세(十割入場稅)’ 개정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고려교향악단의 2대 이사장이었던 독고선(獨孤璇)의 증언에 따르면 매번 관객이 꽉 들어찬 상태로 공연을 하던 것이 세금 인상 이후 절반도 채우지 못하기에 이르렀고 공연 적자는 6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관 월급이 2천원 조금 넘는 수준임을 생각하면 꽤나 큰 적자였던 셈이다.

 

“전에는 객석이 항상 가득 찼는데 6월 공연은 반도 채우지 못했어요. 대관료, 피아노 사용료 등등...각종 요금을 다 지불하고 정부에 총 수익의 50%까지 지불하고 나니 적자만 6만 5천원이더군요.”

 

엎친 데 덮진 격으로 후발주자로 등장하여 고려교향악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서울교향악단”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려교향악단이 도맡아 하던 정부 주도 행사들도 서울교향악단에 하나, 둘 내어주기 시작했고, 재정적으로 불안한 고려교향악단을 그만두고 서울교향악단으로 이직하는 음악가들도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 무려 60만원에 이르는 고려교향악단 소유 악보들을 도난 당하는 당황스러운 해프닝까지 발생하며 회생 불가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1948년 10월 25일, 고려교향악단은 제26회 정기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서양 고전음악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야심찬 설립 포부를 더 이상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 공연된 작품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고려, 그 이후…

 

고려교향악단은 해방공간에서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연주단체였다. 당시 활동하던 거의 모든 연주자들이 고려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남한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며 한국 클래식계의 주춧돌을 다진 사람들도 있었고, 북으로 건너가 북한에서 활동을 하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고려교향악단이 이후 서울교향악단과의 합병과 해군정훈음악대로의 변모 등을 거치며 오늘날 서울시향의 모체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남다르게 다가온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던 격변의 시대 해방공간, 고려교향악단은 그 격변 속에서 음악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낭만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길이 닿았던 그 오케스트라는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주)그루버스 | 대표: 전이배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 645번길 16 NHN엔터테인먼트 플레이뮤지엄 ㈜그루버스 | 사업자 번호: 220-81-77868 통신판매업 신고 제2010-서울서초-0135호
고객센터:cs@groovers.kr | 대표전화: 1833-7001 | 개인정보 보호 책임자: 이재훈
All rights reserved by (주)그루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