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모위츠, 그리고 김순남

 

해방 후 약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 한 명의 미국인이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일라이 헤이모위츠(Ely Haimowitz, 1920-2010). 줄리어드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에 징집되었고 종전 후에는 미군정 학무국에 배치되어 한반도의 음악정책 분야를 담당했다. 이렇게 서울 생활을 시작한 헤이모위츠는 고려교향악단, 서울교향악단, 경성음악학교(現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등의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한국 전통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수시로 음악을 수집하고 농악경연대회를 주선하기도 하는 등 한국 음악계 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런 헤이모위츠의 한국 생활에서 커다란 전환점은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1917-1986?)을 알게 된 것이다. 영어가 능숙했던 문학가 설정식(薛貞植), 김동석(金東錫) 등과 친하게 지내던 헤이모위츠는 그들의 소개로 김순남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김순남과의 인연은 곧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며 둘도 없는 깊은 교분을 나누게 된다. 아마도 3년이 채 되지 않는 김순남과의 이 짧고도 강렬한 만남은 헤이모위츠에게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김순남에 대해 언급해보자.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순남은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1980년대 후반까지는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다. 남쪽에서 올라온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숙청을 당해 오늘날에는 확실한 사망 연도조차 확인하기 힘든 존재다. 한마디로 한국 근현대사의 아이러니가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비운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한 김순남은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사상에 입각한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좌익’성향을 가진 작곡가였던 것이다. 실제로 해방공간에서 김순남은 <인민항쟁가>, <남조선 형제여 잊지 말아라>같은 노래를 작곡해 대중들에게 보급하며 ‘민중을 위한 음악’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김순남 연구의 권위자였던 음악학자 노동은 교수는 “김순남에게 노래란 사상, 민족, 계급을 표현하여 사람들의 참된 생활과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표현양식이었으며, 당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나타낼 수 있는 예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음악으로 하나가 되다

 

하지만 좌우 이념대립의 싹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던 해방공간에서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김순남의 존재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음악인들이 있었고,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미군정의 입장에서도 역시 김순남이 그다지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생각해본다면 미군정 소속 군인 신분이었던 헤이모위츠가 김순남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은 사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둘 사이를 연결시켜주었던 매개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음악’이다. 헤이모위츠는 앞서 언급했듯이 줄리어드 음악원을 졸업했고, 서울에서 군복무를 하면서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한국 초연 기록을 남기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헤이모위츠의 눈에도 김순남의 음악적인 재능은 놀랍게 느껴진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가 대 음악가의 입장에서 서로의 재능을 알아본 두 사람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김순남의 작품인 <산유화>를 비롯한 여러 편의 가곡, 미완성으로 남겨진 <피아노 협주곡> 등은 <인민항쟁가>처럼 일반 대중들을 위해 작곡한 쉬운 노래들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최신 작곡 경향을 수용하여 파격적인 음향과 음색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음악적인 요소도 진부하지 않고 세련되게 녹아있다. 헤이모위츠는 이처럼 놀라운 재능을 지닌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미국에 소개하고 싶어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 공부하고 마음껏 곡을 쓰게 하는 것을 일종의 사명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김순남과 헤이모위츠 모두와 가깝게 지냈던 평론가 박용구 선생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헤이모위츠는 김순남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세계적인 작곡가 월터 피스턴(Walter Piston)에게 우송해서 그의 작품평가를 간청했지. 피스턴은 작곡가의 재질을 인정하고 작품이 공연될만한 수준급이라며 줄리어드에 오기를 희망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고 하더군. 헤이모위츠는 기뻐하면서 이 편지를 그 당시 서울타임즈 주필로 있던 설정식에게 보여줬어.”

 

-박용구의 회고, 1988년 11월 12일 경향신문 발췌-

 

이뿐만이 아니었다. 헤이모위츠는 직접 <산유화>, <피아노 협주곡> 등의 악보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었던 전설적인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vski)를 비롯한 미국 음악계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김순남을 소개하는 것에 정성을 쏟았다. 당시 헤이모위츠가 한국으로 보낸 전보에는 스토코프스키가 김순남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했으며 곧 스토코프스키가 직접 지휘봉을 잡아 연주할 계획이라는 놀라운 소식이 담겨 있었으며 많은 신문들이 떠들썩하게 이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다.  
 

시대가 불러온 이별

 

하지만 헤이모위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실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또한 헤이모위츠를 통해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다른 몇몇 음악가들과는 달리 김순남의 경우는 유학조차도 떠나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배경에는 1947년 8월에 내려진 미군정의 좌익활동 비합법화 조치가 결정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조치로 인해 좌익 계열 음악가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며 대외적인 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순남에게는 체포령까지 내려질 정도여서 음악활동은커녕 은둔과 도피를 반복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헤이모위츠는 미군정 민사처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경찰과 우익단체들의 지나친 탄압으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강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박용구 선생은 헤위모비츠가 김순남을 숨기기 위해 군용 차에 태워 몰래 이동시키기까지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군정 소속 군인이 미군정에 의해 내려진 체포령을 어기고 오히려 도피까지 시켜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쉽게 하기 힘든 행동이다.

 

이처럼 헤이모위츠는 김순남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쳤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1947년 12월 서울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혹자는 헤이모위츠에 대한 갑작스런 본국 송환 명령이 상부에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의견을 내고 김순남을 옹호해서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어쨌든 헤이모위츠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홀로 남은 김순남 역시 7개월 후인 1948년 여름, 결국 월북을 선택하며 둘 사이의 인연의 끈은 안타깝게도 끊어지고 말았다. 헤이모위츠가 미국으로 돌아가며 기고한 글 “조선을 떠나면서”에는 김순남에 대한 애정과 이념논쟁으로 인해 분열하고 있는 당시 음악계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얼마 전에 열린 한 음악경연대회에서 소위 애국자라고 하는 음악가 한 패가 어떠한 다른 음악가들이 심사위원 되는 것을 거절하는 결의를 하였다는 것이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 사람들이 어떠한 정치적 당파에 소속되어 있어서 그들의 심사위원 됨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는 것으로 나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제외된 사람들 가운데는 내가 조선에서도 가장 위대한 음악작곡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한 분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특출한 재능을 의심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또 의심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석연찮은 이유로 그를 이런저런 활동에서 배제하는 일이 알만한 사람들에 의해 공공연히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진정한 창조적 천재에 대하여 취하는 이따위 전단(專斷)이나 어린애 같은 차별, 공공연한 박해는 항상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문화의 파멸과 위축을 불러올 뿐입니다.

 

-헤이모비츠, “조선을 떠나면서”(1948) 中에서-

 

 

43년 후 어느 날…

 

김순남과 헤이모위츠가 서울을 떠나고 43년째 되는 해인 1991년 어느 겨울, 백발의 노인이 된 헤이모위츠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온 방송인 김세원에게 40년 넘게 간직하고 있던 악보 하나를 내어준다. 김세원은 김순남이 남한에 남겨 둔 외동딸이었고, 헤이모위츠가 건넨 악보는 김순남의 <피아노 협주곡> 미완성 육필 악보였다. 그 동안 소문처럼만 전해지던 <피아노 협주곡>의 실존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악보에 새겨진 헤이모위츠에게 헌정한다는 글귀는 김순남과 헤이모위츠가 서로 얼마나 신뢰하던 사이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날의 만남은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김순남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오랜 세월 김순남을 잊지 않고 악보를 간직한 헤이모위츠와의 우정 역시 새롭게 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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