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내악의 밑거름, 해방공간

 

실내악은 보통 독주, 듀오, 트리오 등 말 그대로 ‘실내’에서 연주될만한 비교적 작은 편성의 클래식 음악을 일컫는다. 비록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크고 웅장한 맛은 덜할지 모르지만 연주자 개개인의 기량이 고스란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무대와 객석의 거리도 가깝기 때문에 연주자들의 호흡과 표정까지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클래식 애호가들은 실내악이 진정한 클래식 음악의 정수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방공간 양악계의 실내악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얼핏 생각하면 해방 직후라는 열악한 시대상황과 더불어 실내악을 능숙히 연주할 정도의 뛰어난 연주자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실내악 활동이 활발하지는 못했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숫자의 실내악 단체들이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의 연주는 종종 중앙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라디오로 중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러한 단체들 중에서도 본문에서 소개할 “음악가의집”과 “연악원”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 두 단체는 다양한 실내악 작품들을 연주하며 클래식 레퍼토리를 축적했고,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 실내악 발전의 자양분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음악가의집

 

1946년 9월 26일, 사람들이 꽉 들어찬 배재중학교 강당에서는 “음악가의집” 첫 번째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음악가의집은 ‘음악예술을 발양하는 정신적 집단’을 기치로 내세운 일종의 동인집단이었다. 작곡가 김순남을 비롯해 정희석(鄭熙錫), 문학준(文學準), 이강렬(李康烈), 김원복(金元福), 김흥교(金興敎), 남궁요설(南宮堯卨), 박민종(朴敏鍾), 윤기선(尹琦善), 이건우(李健雨), 이인형(李仁亨) 등이 동인으로 참여했는데, 이들은 모두 해방공간기의 양악계를 주도적으로 이끌던 젊은 음악가들이었다. 이들이 준비한 첫 번째 연주회에서는 멘델스존의 피아노 3중주 D단조(바이올린 : 정희석, 첼로 : 이강렬, 피아노 : 윤기선),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테너 : 박은용, 피아노 : 윤기선),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10번(바이올린 : 박민종, 피아노 : 김원복)등 정통적인 클래식 작품들이 연주되었다..

 

이후 음악가의집에는 소프라노 정훈모(鄭勳謨)와 지휘자 임원식(林元植)이 새롭게 동인으로 합류하였고, 더욱 활발하게 연주활동에 나서게 된다. 1946년 11월 15일에 있었던 두 번째 연주회에서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바이올린 : 문학준, 피아노 : 김원복), 슈베르트 ‘백조의 노래’(독창 : 남궁요설, 피아노 : 윤기선), 브람스 랩소디 1, 2번(피아노 : 이인형) 등을 연주했으며 1946년 12월 22일에는 전쟁 피해자 구호 음악회에 출연하여 브루흐, R.슈트라우스, 슈베르트, 하이든 등의 실내악 작품을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한마디로 독주곡부터, 성악곡, 앙상블까지 실내악 명곡들을 모두 아우른 셈이다.

 

하지만 음악가의집이 항상 서양 클래식만 연주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48년 11월 12~13일에 가졌던 ‘우리 가곡의 밤’(테너 : 박은용, 피아노 : 이인형) 공연은 이들이 단순히 서양 고전음악을 가져와 연주하는 것을 넘어 서양음악에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해방공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곡가들인 김순남, 김성태, 이건우, 임동혁의 가곡 18곡으로만 이루어진 이날의 공연은 모든 곡목을 한국 작곡가로만 채워 연주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물론 연주된 18곡 모두가 고르게 훌륭한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작곡가마다 청중들의 호응도 차이 역시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월북 문학가 김동석(金東錫)이 남긴 평론집에는 공연에 대한 재미있는 인상을 엿볼 수 있다.

 

나처럼 두 번 다 들은 청중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고 이틀의 청중은 전혀 다른 청중일 텐데 그 반향은 수학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두 번 다 똑같았다. 임동혁씨의 곡목에는 전혀 반향이 없고 김성태씨의 곡목에는 조금 있고 이건우씨의 가곡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향이 있고 김순남씨의 가곡에 대해서는 배재강당이 떠나갈 것 같았다. (…중략…)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임동혁 씨 작품의 가사는 옛날 시조이고 김성태 씨 작품의 가사는 한시 번역이었기 때문에 청중을 움직이지 못한 원인이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이들 작곡가가 그 창작의 원천을 시대적인 민족적 민중의 심장의 고동에 두지 않고 고전적인 음악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움직임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한 작곡가가 어찌 그 시대의 민중의 감격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김동석, 뿌르조아의 인간상(1949) 中에서-

 

혹자는 김순남, 이건우 등 이후 월북을 택한 음악가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이유로 음악가의집을 좌익단체라고 규정하곤 한다. 하지만 평론가 박용구는 오히려 좌우익 편가름 현상에 대한 반성과 음악에 대한 학구적인 열정으로 등장한 단체가 음악가의 집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판단은 개인의 몫이지만 오늘날에는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당시의 좌익 음악단체들은 민중들과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클래식 연주를 지양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음악가의집은 오히려 다양한 클래식을 연주하던 단체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말로 좌익단체였다면 ‘우익’이라고 비판 받았던 김성태나 임동혁의 곡을 무대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연악원(硏樂院)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安柄玿)와 그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이애내(李愛內)가 함께 이끌었던 연악원은 안병소, 이애내에게 음악을 배우던 문하생들이 모인 연구집단 성격의 단체였다. 말하자면 오늘날 뛰어난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문하생들을 일컫는 소위 ‘아무개 선생 클래스’의 원조 격인 셈이다. 이처럼 연악원은 교육 중심의 단체였고 전적으로 연주만 하지 않은 탓에 그 활동이 대외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정확한 창립 시기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부부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38년 이후부터는 꾸준히 학생들을 양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공간기 내내 조용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음악을 연구하던 연악원은 1947년 1월에 열린 “안병소 문하생 제1회 대연주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이 공연에서는 독주곡과 실내악, 협주곡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악원 문하생들이 직접 연주하였다. 당시의 연주곡목을 보면 독주와 앙상블, 협주곡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고심하여 선곡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연악원 1회 연주회 연주곡목>

 

1월 6일

바흐 :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단조 (피아노 : 신재덕)

모차르트 :  현악4중주 8번 D장조 (바이올린 : 전희봉, 정봉렬 비올라 : 김희조 첼로 : 이강렬)

슈만 : 교향적 연습곡 (피아노 : 이영옥)

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8번 G장조 (바이올린 : 전희봉 피아노 : 이영옥)

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3번 (피아노 : 백창규 지휘 : 안병소)

 

1월 7일

하이든 : 피아노 3중주 G장조 (바이올린 : 전희봉 첼로 : 김준덕 피아노 : 백창규)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피아노 : 김성복)

모차르트 : 바이올린 소나타 7번 (바이올린 : 정봉렬 피아노 : 이영옥)

바흐 : 3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바이롤린 : 전희봉 정봉렬 안병소)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C단조 (피아노 : 이정희 지휘 : 안병소)

 

이틀간의 연악원 연주회에 모두 참석했던 평론가 박영근(朴榮根)은 문하생 발표회라는 다소 식상할법한 기획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귀한 신인을 발견한 것에 큰 의의가 있으며, 안병소와 이애내의 내면적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호평을 내놓았다. 박영근의 이러한 평을 통해 연악원 공연이 학생들 위주로 출연하는 연주회였음에도 연주의 수준 면에 있어서 기성 연주자들과 비교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도 연악원의 공연은 꾸준히 이어졌는데, 1947년 10월 1일에는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베토벤 주명곡(奏鳴曲, 소나타)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제2회 연주회를 열었고, 안병소가 지휘를 맡은 1948년 2월 20, 21일 고려교향악단 제20회 정기연주회에는 연악원 문하생인 전희봉이 찬조출연 형식으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연악원은 단순한 문하생 모임을 넘어 애호가들에게 주목 받는 연주단체로 성장했으며, 이러한 연악원의 활동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꾸준히 양질의 실내악을 연주함과 동시에 훌륭한 음악가들을 길러내는 교육의 산실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정경화, 김남윤, 강충모, 신수정 등 오늘날 한국 클래식계의 거목으로 평가를 받는 연주자들부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까지 뛰어난 예술가들이 연악원 출신 음악가에게 음악을 배웠다는 점은 연악원이 한국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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